영주 삼판서고택복원 과정-I 담당공무원 황영회, 삼봉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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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6회 작성일 23-08-06 07:14본문
삼판서 고택 복원...문예대학 제9기 황영회
2003년 2월 교통행정계장에서 문화재계장으로 보직변경 인사가 있었다. 보직이 변경되면 새로 맡은 업무를 하루빨리 파악하여 업무추진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공무원의 올바른 자세다. 업무를 파악하다가 삼판서 고택복원 청원과 영주시의 답변 내용을 보았다. 김숙진 씨 등이 영주유림 404명의 서명을 받아 삼판서 고택을 선비촌에 복원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1999년 3월 12일 냈었다. 영주시는 선비촌 조성사업은 문화재관리국의 승인을 받아 금년 하반기에 준공예정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확실한 고증자료가 없어 불가하다는 답변을 하였다.
평소 큰집에 가면 자주 형님께서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별로 관심 없이 들었다. 삼판서 고택은 어렸을 때 몇 번 본적이 있다. 형님 처갓집이 영주 서리골에 있어 거기를 가자면 구성공원 앞으로 지나 가는데 그 옆에 고가가 바로 삼판서 고택이었다. 삼판서 고택은 영주동 구성공원 431번지 758평의 부지 위에 45평 규모로 지어진 입구자형 팔자지붕 한옥이었다. 건립연대가 1,200년경으로 800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우리나라 민간 목조건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면 국보로 지정 될 만큼 소중한 가치를 가진 건물이다.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 살다가 그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에게 물려주고, 판서 황유정은 그의 사위 영유현령 김소량에게 물려주었는데 그의 아들이 세종 때 천문학자로 유명한 이조판서 김담이니 세 판서가 잇달아 살았다하여 삼판서 고택이라 불리었다. 그 후 이조 판서 김담 후손들이 계속 이집에서 살다가 조선 말기에 진주 강 씨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 집은 멀리는 소백산이 감싸고, 바로 뒤는 구성산이 있으며, 구성산 옆으로 서천이 굽어 흐르고 있어 배산 임수의 천하 명당이었다.
천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실제로 수많은 인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조선개국 1등 공신으로 조선 500년의 설계를 하였고 역사의 주역이 되었던 삼봉 정도전 선생, 한성판윤 정도복, 참판 정도존, 사헌부지평 황전, 성균관대사성 황현, 순흥훈도 황연, 금산군수 김증, 권지훈련녹사 김만석, 진사 김만균, 생원 김만칭, 좌승지 김윤, 영원군수 김우익, 김휘준 선생 등 인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집이 우리나라에는 없고, 전 세계의 역사에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판서 고택은 이 고을 유림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을 오갈 때는 반드시 이 집에 들러 세상사와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지내던 영남 선비의 거점이었다. 영주에는 고려시대 건물로 제민루와 삼판서 고택이 있었다.
1961년 사라호 태풍 때 서천제방이 무너지면서 서천의 물이 영주 시가지에 범람하여 큰 수해를 입은 적이 있다. 이때 제민루는 무너지고 삼판서 고택은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시가지가 팽창되면서 삼판서 고택이 완전히 헐리고 말았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공무원 이야기에 의하면 1962년도에 문화재 관리법이 처음 시행되었는데 이 집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사유재산권 행사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철거해 버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목조건물인 삼판서 고택을 그대로 두었다면 국보로 지정되고 교과서에도 등재되었을 것을, 정말로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제민루는 공공건물이라 뜻있는 영주유림들이 힘을 합쳐 구학공원에 새로 지었다. 목조건물로 지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콘크리트 건물로 지었으니 잘 못 지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삼판서 고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고, 영주 선비들이 모이던 대표적 선비의 곳이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집으로써 시민들로부터 애정과 사랑을 듬뿍 받아 왔던 집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영주시민들은 지금이라도 복원을 하여야 한다고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내 생각도 같았다.
그러나 막상 추진하려고 하니 애로 사항이 많았다. 우선 시청조직 내부의 반대에 부딪쳤다. 후손들이 팔아먹은 집을 왜 시에서 지어주느냐. 형태도 없는 집을 뭘 보고 짓느냐. 다른 문중에서도 없어진 집을 복원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추진을 하려면 시비로는 불가하고 중앙정부의 예산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이 찬성을 하여야 가능한 일인데 추진하다가 안 되면 황계장이 책임 질수 있느냐는등등... 심지어는 황판서의 후손이라서 추진하려고 한다는 모함 같은 이야기도 들렸다. 공무원은 청렴, 결백, 공정, 평등, 공익, 정당, 근면, 검소, 모범성이 강조되고 사심이 있으면 절대로 안 되며, 시민에 대한 봉사자로서 주민들의 복리증진과 지역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공무원의 양심으로 판단해 볼 때 반대 이유가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문화재계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삼판서 고택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영주 역사에 죄인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대부분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 중에 일부는 무사안일한 사람도 있다. 상사가 시키면 하고, 시키지 않으면 안 한다. 새로운 일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정당성이 있는 일이라도 상사의 의사에 반하여, 일을 만들고 또 이 일을 추진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일부 상사가 삼판서 고택 복원사업 추진을 반대하고 있다. 상사의 의사에 반하여 적극 일을 추진하면 상사에게 미움을 사서 진급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데 추진을 하지 않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 했다.
2003년 당시 매월 첫 주 월요일 아침 9시에 시민회관에서 직원 500명을 대상으로 직원 조회를 하였는데 직원들 중에서 5분 발언을 할 사람은 신청을 하라고 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5분 발언 신청을 했다. 제목은 삼봉 정도전 선생의 재조명 사업추진이었다. 삼봉 정도전 선생이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빛나는 업적 그리고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 등을 강조하고, 선생의 재조명 사업 7가지를 제안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정도전 선생의 생가인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일부 직원들은 잘했다고 격려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문화재 시설계에서 삼판서 고택 복원 추진 검토 서류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보여 주면서 서명을 하라고 했다. 읽어보니 삼판서 고택을 추진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달아 시장 결재를 받는 문서였다. 의견이 다르므로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협조 서명을 받지 않고 시장 결재까지 득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삼판서 고택 복원 사업 추진의 당위성을 문서로 만들어 시장실에 들고 갔다. 설명을 하려고 하니 다 알고 있으니 설명할 필요 없다고 해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시장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장실을 나와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잠시 후 과장이 시장실에 불려 갔다 오더니 삼판서 고택 추진 계획을 수립하여 시장 결재를 받으라고 말했다. 시장님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2005년 3월 삼판서 고택 복원 추진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결재를 올렸더니 일사천리로 결재가 되었다. 영주시장의 결심은 받았으나 앞으로 시의원과 경상북도, 문화재청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았다. 먼저 삼판서의 후손인 선성김씨, 평해황씨, 봉화정씨가 중심이 되어 타 문중 어르신들의 협조를 구하는 일을 했다. 타 문중 어르신들도 대부분 협조를 하여 쉽게 추진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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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교통행정계장에서 문화재계장으로 보직변경 인사가 있었다. 보직이 변경되면 새로 맡은 업무를 하루빨리 파악하여 업무추진에 차질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공무원의 올바른 자세다. 업무를 파악하다가 삼판서 고택복원 청원과 영주시의 답변 내용을 보았다. 김숙진 씨 등이 영주유림 404명의 서명을 받아 삼판서 고택을 선비촌에 복원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1999년 3월 12일 냈었다. 영주시는 선비촌 조성사업은 문화재관리국의 승인을 받아 금년 하반기에 준공예정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확실한 고증자료가 없어 불가하다는 답변을 하였다.
평소 큰집에 가면 자주 형님께서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별로 관심 없이 들었다. 삼판서 고택은 어렸을 때 몇 번 본적이 있다. 형님 처갓집이 영주 서리골에 있어 거기를 가자면 구성공원 앞으로 지나 가는데 그 옆에 고가가 바로 삼판서 고택이었다. 삼판서 고택은 영주동 구성공원 431번지 758평의 부지 위에 45평 규모로 지어진 입구자형 팔자지붕 한옥이었다. 건립연대가 1,200년경으로 800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우리나라 민간 목조건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지금까지 그대로 있었다면 국보로 지정 될 만큼 소중한 가치를 가진 건물이다.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 살다가 그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에게 물려주고, 판서 황유정은 그의 사위 영유현령 김소량에게 물려주었는데 그의 아들이 세종 때 천문학자로 유명한 이조판서 김담이니 세 판서가 잇달아 살았다하여 삼판서 고택이라 불리었다. 그 후 이조 판서 김담 후손들이 계속 이집에서 살다가 조선 말기에 진주 강 씨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 집은 멀리는 소백산이 감싸고, 바로 뒤는 구성산이 있으며, 구성산 옆으로 서천이 굽어 흐르고 있어 배산 임수의 천하 명당이었다.
천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실제로 수많은 인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조선개국 1등 공신으로 조선 500년의 설계를 하였고 역사의 주역이 되었던 삼봉 정도전 선생, 한성판윤 정도복, 참판 정도존, 사헌부지평 황전, 성균관대사성 황현, 순흥훈도 황연, 금산군수 김증, 권지훈련녹사 김만석, 진사 김만균, 생원 김만칭, 좌승지 김윤, 영원군수 김우익, 김휘준 선생 등 인재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집이 우리나라에는 없고, 전 세계의 역사에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판서 고택은 이 고을 유림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을 오갈 때는 반드시 이 집에 들러 세상사와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지내던 영남 선비의 거점이었다. 영주에는 고려시대 건물로 제민루와 삼판서 고택이 있었다.
1961년 사라호 태풍 때 서천제방이 무너지면서 서천의 물이 영주 시가지에 범람하여 큰 수해를 입은 적이 있다. 이때 제민루는 무너지고 삼판서 고택은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시가지가 팽창되면서 삼판서 고택이 완전히 헐리고 말았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공무원 이야기에 의하면 1962년도에 문화재 관리법이 처음 시행되었는데 이 집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사유재산권 행사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철거해 버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목조건물인 삼판서 고택을 그대로 두었다면 국보로 지정되고 교과서에도 등재되었을 것을, 정말로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제민루는 공공건물이라 뜻있는 영주유림들이 힘을 합쳐 구학공원에 새로 지었다. 목조건물로 지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콘크리트 건물로 지었으니 잘 못 지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삼판서 고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고, 영주 선비들이 모이던 대표적 선비의 곳이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집으로써 시민들로부터 애정과 사랑을 듬뿍 받아 왔던 집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영주시민들은 지금이라도 복원을 하여야 한다고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내 생각도 같았다.
그러나 막상 추진하려고 하니 애로 사항이 많았다. 우선 시청조직 내부의 반대에 부딪쳤다. 후손들이 팔아먹은 집을 왜 시에서 지어주느냐. 형태도 없는 집을 뭘 보고 짓느냐. 다른 문중에서도 없어진 집을 복원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추진을 하려면 시비로는 불가하고 중앙정부의 예산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이 찬성을 하여야 가능한 일인데 추진하다가 안 되면 황계장이 책임 질수 있느냐는등등... 심지어는 황판서의 후손이라서 추진하려고 한다는 모함 같은 이야기도 들렸다. 공무원은 청렴, 결백, 공정, 평등, 공익, 정당, 근면, 검소, 모범성이 강조되고 사심이 있으면 절대로 안 되며, 시민에 대한 봉사자로서 주민들의 복리증진과 지역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공무원의 양심으로 판단해 볼 때 반대 이유가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문화재계장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삼판서 고택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영주 역사에 죄인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대부분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그 중에 일부는 무사안일한 사람도 있다. 상사가 시키면 하고, 시키지 않으면 안 한다. 새로운 일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리 정당성이 있는 일이라도 상사의 의사에 반하여, 일을 만들고 또 이 일을 추진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일부 상사가 삼판서 고택 복원사업 추진을 반대하고 있다. 상사의 의사에 반하여 적극 일을 추진하면 상사에게 미움을 사서 진급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데 추진을 하지 않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 했다.
2003년 당시 매월 첫 주 월요일 아침 9시에 시민회관에서 직원 500명을 대상으로 직원 조회를 하였는데 직원들 중에서 5분 발언을 할 사람은 신청을 하라고 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5분 발언 신청을 했다. 제목은 삼봉 정도전 선생의 재조명 사업추진이었다. 삼봉 정도전 선생이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났다는 사실과 빛나는 업적 그리고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 등을 강조하고, 선생의 재조명 사업 7가지를 제안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정도전 선생의 생가인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일부 직원들은 잘했다고 격려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문화재 시설계에서 삼판서 고택 복원 추진 검토 서류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보여 주면서 서명을 하라고 했다. 읽어보니 삼판서 고택을 추진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달아 시장 결재를 받는 문서였다. 의견이 다르므로 서명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협조 서명을 받지 않고 시장 결재까지 득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동안 많은 고민을 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삼판서 고택 복원 사업 추진의 당위성을 문서로 만들어 시장실에 들고 갔다. 설명을 하려고 하니 다 알고 있으니 설명할 필요 없다고 해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시장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장실을 나와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데 잠시 후 과장이 시장실에 불려 갔다 오더니 삼판서 고택 추진 계획을 수립하여 시장 결재를 받으라고 말했다. 시장님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2005년 3월 삼판서 고택 복원 추진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결재를 올렸더니 일사천리로 결재가 되었다. 영주시장의 결심은 받았으나 앞으로 시의원과 경상북도, 문화재청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았다. 먼저 삼판서의 후손인 선성김씨, 평해황씨, 봉화정씨가 중심이 되어 타 문중 어르신들의 협조를 구하는 일을 했다. 타 문중 어르신들도 대부분 협조를 하여 쉽게 추진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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